프랑스인들의 "볼" 사랑

- 여기 커피 한 사발 주세요.

우리 엄마는 작은 섬에서 나고 자랐다. 엄마의 엄마도, 엄마의 아빠도 그 작은 섬에서 나고 자랐고, 그 형제들도 대부분 똑같이 섬에서 나고 자란 이들과 결혼해서 섬에서 아이를 낳고 키웠다. 그런 엄마는 고등학교 진학하는 해에 혈혈단신 "육지"로 나오게 되었다. 엄마의 형제들 중에서 거의 제일 첫 번째로 육지로 나가게 된 이가 우리 엄마였다. 지금처럼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그 시절에 육지 소식을 알기란 쉽지 않았다. 무슨 조선시대 이야기냐 싶겠지만, 보따리 장사꾼이 육지에서 물건을 떼다 섬으로 와서 육지 소식을 간혹 들려준 것이 얼마 안되는 소식통 중 하나였고, 간혹 누구네 몇 째는 육지로 시집갔다더라 하며 건너서 이야기를 들으며 겨우 육지가 어떤 곳인가 가늠만 하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저 수평선 너머에 땅이 있고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들어서 알고, 배워서 알고는 있으나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시절 무슨 자신감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육지로 어떻게 나오게 된 건지, 떠올리기만 해도 아찔하다는 엄마다.

그런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 내가 똑같이 연고 하나 없는 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됐을 때 나의 마음은 조금 달랐다. 그 당시에는 이미 인터넷이 있어 내가 원하는 모든 정보를 편하게 내 방에 앉아 찾아볼 수 있었고, 문화도 개방되어 어려서부터 외국 영화며 드라마, 예능 등을 원 없이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40년도 더 전에 섬에서 육지로 배를 타고 나가던 엄마의 떨림과, 기대, 그리고 두려움이 비행기를 타고 다른 대륙으로 가는 나에게는 없었다. 타고나길 무덤덤한 성정 때문에도 더욱 그랬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문화와 관습을 접하고 소위 "문화 충격"을 받기에 나는 너무나도 무덤덤했고, 이미 그 나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성격 때문일까, 프랑스인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같이 살게 된 지금도 여전히 나는 무덤덤하다. 물론 처음에는 문화 차이 때문에, 언어 장벽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었다. 국제결혼을 하게 된 다른 분들도 공감을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문화 차이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일보다는 개인과 개인의 성격 차이나 가치관 차이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았고 그 마저도 대부분 연애 초반 1년 안에 빠르게 해프닝처럼 지나갔고 쉬이 대화로 해결되었다. 예를 들면, 밥을 먹자마자 설거지를 한다 vs. 밥을 먹고 나서 티비도 보고 디저트도 먹고 쉬다가 나중에 치운다 같은 문제는 국적이나 문화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 선호의 문제로 한국인-한국인 관계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잔잔한 연못 같은 일상 속에서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의외로 별 거 아닌 사소한 일들이다. 그중 하나가 몇 해 전 날씨가 으슬으슬해지기 시작한 어느 초겨울 날, 해맑은 모습으로 핫초코를 한 사발 만들어 국그릇째 마시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었다. 당시에는 사극 속 사약을 받는 죄인 같은 모습에 웃고 말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집에 한 가득 쌓여있는 머그컵을 놔두고 굳이 국그릇에 마시다니.. 이상했다. 당사자에게서는 그냥 이렇게 마시는게 컵에 마시는 것 보다 더 좋다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외국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프랑스인의 습관"을 리스트로 만들어 둔 기사에서 프랑스인들은 - 물론 모든 프랑스인이 그렇지는 않다. - 커피나 차, 핫초코 같은 따뜻한 음료를 볼 bowl로 마신다는 얘기를 읽게 되었다. 나랑 같이 사는 이 남자만 특이한 게 아니었다. 실제로 인터넷에는 "프랑스인들은 왜 커피를 사발로 마시나요?"를 물어보는 사람이 나 말고도 많이 있었다.

프랑스어로 bol이라 부르는 그릇은 중간이 오목하고 움푹 파인 한국의 국그릇이나 라면 용기와 비슷하다. 한국에서는 외래어 그대로 "볼"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프랑스인들은 주로 아침 식사 때나 오후 4시 간식 시간에 커피나, 차, 핫초코 같은 음료를 볼에다 마시는데 오랜 시간 동안 습관처럼 굳어온 것이라 정확히 언제 누가 시작한 일인지, 왜 인지에 대한 정설은 없다. 여러 프랑스인들의 주장을 조합해 컵이 아니라 볼을 이용하는 이유를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1. 가족 대대로 이렇게 해 왔고, 식당에서도 이렇게 팔고, 관습으로 굳어져서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2. 식사 대용으로 큰 그릇에 따뜻한 음료를 마셔서 배를 채울 수 있다.
3. 손잡이를 잡는 대신 양 손으로 그릇을 감싸 쥐고 마시면, 추운 날 몸을 따뜻하게 녹일 수 있다.
4. 무엇보다 크루아상, 빵 오 쇼콜라, 타르틴 Tartine - 버터나 잼, 누텔라 같은 스프레드를 바른 토스트 - 을 쉽게 음료에 담가 먹을 수 있다. 보통 머그잔의 좁은 입구에 크루아상을 어떻게 찍어먹나?!
5. 그릇 입구가 넓다 = 공기에 노출된 표면 역시 넓어서 뜨거운 음료를 빨리 식혀 마실 수 있다.
6. 집에서 카페오레나 핫초코를 만들려면 냄비에 우유를 끓이게 되는데, 작은 머그컵에 우유를 부으려다보면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 수도 있다. 넓은 볼에 쉽게 부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 중에서도 프랑스인들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유는 4번이다. 아침 식사로 카페오레에 크루아상이나 타르틴을 담갔다가 먹는 것이 얼마나 황홀한 경험인지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

이런 관습은 자연히 언어에도 녹아 있는데, 보통 영어 관용구로 a cup of tea (차 한 잔), a cup of coffee (커피 한 잔)을 사용하듯이 프랑스어로는 un bol de café au lait (카페오레 - 혹은 라테 - 한 그릇), un bol de thé (차 한 그릇)이라는 표현을 쓴다.

내 눈에는 국 그릇, 혹은 라면 그릇으로 보이는 이 그릇이 프랑스인에게는 카페오레 볼로 보일지도 모른다.

순간의 충격을 가라앉히고 잘 생각해보면, 추운 날 사발로 커피를 마시고 차를 마시는 프랑스인의 모습이 마냥 이상한 건 아니다. 나 역시 날이 추워지면 뜨끈한 국물 음식을 사발로 들이키고 싶어 하는 한국인이 아닌가. 바삭바삭한 수십수백 개의 결이 매력인 크루아상을 굳이 커피에 담가서 눅눅하게 먹는 모습 역시 낯설지만 나의 어린 시절 추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 엄마가 달달한 믹스 커피를 마실 때 같이 먹는 "에이스"라는 비스킷을 엄마 커피에 살짝 담갔다 먹었던 것이 나의 첫 번째 커피였다. 이번 겨울에는 편견을 내려놓고 카페오레 한 사발에 크루아상을 찍어 먹는 경험을 한 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별 것 아닌 일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추억과 감성,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작은 발걸음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Photos via: Lapetitecreperie, The Local, Siennarouss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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