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 블루스: 우울한 겨울

- 윈터 이즈 커밍, 소 왓?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 고질병인 수족냉증이 심해지고 입술이 부르트는 걸 보니 겨울이 다가오고 있나 보다. 유독 잠이 많아 고생한 기억이 많은 나에게 겨울은 잔인한 계절이다. 해가 늦게 뜨니 일어나서 등교를 하든, 출근을 하든 활동해야 할 아침 시간에도 밖은 어두침침하고 나는 잠에서 깨지 못한다. 해가 짧아져 일몰 시간도 빠르니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이미 한 밤 중. 하루에 한 시간도 제대로 해를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남들이 극찬해 마지않는 암막 커튼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계절에 상관없이 해가 떠서 방 안이 환하게 밝아져야 겨우 아침에 일어날 만하기 때문이다. 아마 겨울만 되면 몸이 축 처진 듯이 힘이 없고, 잠이 많아지고, 심한 경우 우울감과 무기력함까지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영어로 윈터 블루스 Winter Blues, 겨울 우울증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1년 중 겨울이 반인 - 그중 대부분의 날은 눈이 내리고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 지역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캠퍼스 내 기숙사를 제외한 대부분 건물을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해 야외로 다니는 시간을 최소화했을 정도로 겨울이 거칠고 긴 곳이었다. 겨울 학기가 되면 캠퍼스 곳곳에 "윈터 블루스를 함께 이겨냅시다!" 같은 캠페인성 문구나 윈터 블루스를 이겨내는 방법 5가지, 학내 카운슬링 센터를 이용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 홍보물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겨울이 되면 야외 활동하기 귀찮고, 사람도 별로 만나고 싶지 않고, 이불속에 파묻혀 고칼로리 음식이나 먹고 싶은 기분이 드는 이유가 단순히 날씨가 우중충하고 밖이 추워서 혹은 내가 게을러서가 아닐지도 모르는 것이다. 계절성 정서 장애 (Seasonal Affective Disorder, 줄여서 SAD라고 부른다. 이름부터 얼마나 슬프고 우울한지.)라고 불리는 학계에서 정식으로 공인된, 실체가 있는 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도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학교 측에서 공식적으로 윈터 블루스 관련 포스터를 만들기도 하고,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붙이기도 한다. 

/ 사진: University of Utah, University of Washington

물론 단순히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고, 왠지 우울한 기분이 든다는 정도로 우울증의 일종인 계절성 정서 장애를 앓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윈터 블루스는 진단명도 아니고 SAD의 경우 윈터 블루스 보다 증상이 훨씬 심각한 경우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미국 정신의학회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에 따르면, SAD의 원인은 해가 짧은 겨울에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데서 야기된 체내, 특히 뇌내 생화학적 불균형과 생체 리듬의 변화 때문이라고 한다. 햇빛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양소인 비타민 D가 부족한 것이 SAD의 원인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유로 SAD를 치료하기 위해서 빛을 이용한 라이트 테라피를 사용하기도 한다. 깊은 계곡에 위치해 있어 매년 9월 말쯤부터 3월 중순까지 약 6개월 동안 밝은 햇빛을 구경할 수 없는 노르웨이의 Rjukan이라는 마을에서는 몇 해 전, 산 위에 대형 거울을 설치해서 마을 광장에 빛을 반사해서 비추도록 하기도 했다.

Rjukan 마을 광장에 비친 반사광, 산 중턱에 걸린 태양이 아니라 대형 거울의 모습이다. / Photo: Dailymail

아직까지는 SAD가 우울증의 한 분류로 인정받고 있기는 하지만, 한 편에서는 계절성 정서 장애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34,000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우울증 소견을 강하게 보이는 답변자들이 사는 지역과, 그 지역의 일조량의 상관관계를 조사했을 때 특별한 관계를 찾지 못했다는 연구가 그중 하나다. 일조량이 극도로 적은 노르웨이의 Tromsø라는 도시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주민들의 겨울철 우울증 발생 비율이 마을의 높은 위도나 낮은 일조량에 비해 낮은 것으로 밝혀졌다. 

떠올려보면 1년의 반이 겨울인 곳에서 살면서 나는 특별히 더 우울하다거나 힘든 점 없이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인간은 결국 적응의 동물인 것일까. 나는 계절과 관계없이 단순히 잠이 많고 게으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 글은 윈터 블루스는 실체가 있는 현상이니, 기온이 떨어지는 지금부터 다시 날이 따뜻해지기 전까지 약 4개월 동안은 내가 좀 게으르더라도 내버려 두라는 선언이자 나만의 면죄부가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각종 연구를 찾아볼수록 내세울 수 있는 핑곗거리가 하나둘씩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인간이 계절 변화 때문에 저도 모르게 우울하고 무기력해지고 뇌기능도 떨어진다는 것보다는 환경을 극복하고 적응해 나가는 존재라는 가정이 조금 더 희망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추운 겨울날 따뜻한 방 안에서 도톰한 이불을 둘러 덮고 귤을 까먹으면서 책을 읽거나 밀린 드라마를 몰아보는 우리네 모습은 핑계가 아니라, 미덕이 아닌가.

(Photos via: Dailymail, University of Utah, University of Washing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