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죽어야 내 집이 된다 - 프랑스의 특이한 부동산 매입 방식

집주인이 죽어야 비로소 내 집이 된다. 내 집 장만을 위해서 집주인이 얼마나 오래 살지, 언제 죽을지에 도박을 건다. 무슨 공포 영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프랑스의 특이한 부동산 매입 방식 "비아제 Viager"에 대한 설명이다. Viager는 프랑스어로 '종신 연금'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파리 근교에서 무시무시한 월세를 내고 살다 보니 더더욱 내 집 장만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당장 집을 사려는 계획은 아니지만 심심할 때 한 번씩 부동산 거래 사이트에 들어가 이 집 저 집 구경하면서 대리 만족을 하는 게 일종의 취미가 되었다. 그렇게 여러 매물을 보다 보면 가끔씩 '헉'하게 싼 가격에 혹하는 집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싼 가격에 내놨을까? 말도 안된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전부 비아제로 거래하는 집이었다.

프랑스의 부동산 거래 사이트 Seloger.com에 올라온 Viager 거래 리스팅들. 부케 가격을 크게 내세운 것을 볼 수 있다. 

공고의 상세 설명란에는 항상 집주인의 성별과 나이가 적혀있다.

비아제 방식으로 자신의 집을 판매하는 이들은 주로 70대 이상 독거노인들이다. 무엇보다 생활의 안정을 원하는 노인들에게 비아제는 본인 소유의 부동산을 현금화하기에 아주 좋은 방식이다. 비아제 시스템의 특성상 부케 Bouquet 라고 하는 큰 금액의 현금을 한 번에 받을 수 있고, 나머지 금액은 자신이 죽기 전까지 매달 고정적으로 일정 금액씩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독거 노인들이 비아제 시스템을 선호하는 이유는 죽을때까지 자신의 집에 계속 살 수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비아제 거래를 통해서 자신에게 익숙한 집, 동네, 이웃과 친구들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데다 매달 안정적인 수입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비아제 = 부케 + 월부 분할 납부금

특히 70세 이상이면 비아제로 생긴 수입에 대해서는 수입의 30%만 세금 징수 대상이 되는 세금 혜택도 있다. 또한, 비아제 시스템은 법적으로도 잘 보호되어있어서, 부동산 매입자가 월부 분할 납부금을 제때 치르지 않는 경우 몇 번의 주의 경고를 받게 된다. 경고를 받은 후에도 월부 납부금을 내지 않을 때에는 판매자가 계약 시 받은 부케와 지금까지 받은 월부 납부금을 돌려주지 않아도 되고 집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도 가지게 된다. 생각보다 이런 일들이 꽤 일어난다고 한다. 

비아제 방식으로 집을 사는 이들은 주로 40~50대로 아직 활발하게 경제 활동을 하는 나잇대에 미리 은퇴 후에 살 집을, 가능하면 좋은 가격에 사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지금까지의 설명만 보면 판매자에게만 너무 이득이 아닌가 싶겠지만, 비아제는 매입자에게도 '도박'을 할 만한 충분한 메리트가 있다. 판매자가 임종 전까지 해당 부동산에 계속 머무는 경우, 부동산의 가치를 매길 때 - 판매자의 나이에 따라 다르긴 하나 - 실제 가치보다 훨씬 낮게 매기기 때문이다. 이때 매겨진 금액을 발러 오큐페 Valeur Occupée 라고 한다. (발러 오큐페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소리 나는 대로 부르겠다. 판매자가 부동산을 여전히 점거하고 있기 때문에 책정된 가치라고 보면 될 듯.)

부케 금액은 따로 정해진 바는 없지만 보통 이 발러 오큐페의 30-40% 정도로 계약금처럼 계약 시에 지급한다. 발러 오큐페에서 부케 금액을 제한 나머지를 매월 나누어 집 주인이 죽을 때까지 지급하는 셈이다. 매달 얼마를 지급해야하는지 역시 판매자의 나이와 프랑스의 평균 예상 수명에 따라 계산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 거기다 일반적인 부동산 매입 방식으로 대출을 받아 대출금을 갚는 것과 비교하면 비아제의 월 납부금은 거의 이자를 내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정도니, 매입자들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거래인 것이다. 

실제 예시를 보려면 더 보기 클릭↓

실제 예시 (출처: Seloger.com)

파리 6구의 90㎡(약 30평) 아파트, 방 2개

집 주인 82세 여성

해당 부동산 실제 가치: 1,100,000 유로 (약 14억 2천만 원)

발러 오큐페: 710,600 유로 (약 9억 2천만 원)

부케: 447,359 유로(약 5억 8천만 원)

월부 분할 불입금: 3,000 유로 (약 386만 원) → 집 주인이 약 89세까지 살 것으로 가정하고 계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산 집의 주인이 빨리 죽을 수록 내가 이득을 보는 비아제 거래. 프랑스의 약간은 음침하면서도 지극히 이성적인 제도. 혹시나 내가 비아제 거래로 집을 구매한다면 만에 하나라도 집주인이 얼른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들지 않을까 싶어 개인적으로는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제도만 놓고 본다면 분명 장점이 많은 제도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특히나 노인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고, 국가 연금만으로 완벽히 독거노인들의 생활을 질을 보장하기 힘든 경우라면 이런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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