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을 선물하다

한국에서 추석과 구정을 큰 명절로 가족들과 함께 보내듯이, 프랑스에서는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명절처럼 보낸다. 12월에는 이런 명절 특수 때문에, 특히나 크리스마스 선물 준비 때문에 소비가 큰 폭으로 늘어난다. 바야흐로 소비의 계절인 것이다. 집마다 전통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은 12월 25일 아침 다 같이 둘러앉아 서로 준비한 선물을 열어보는 '선물 개봉식'이 나름 크리스마스의 큰 하이라이트이기도 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내가 갖고 싶었던 것 딱 한 가지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셨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첫 크리스마스를 보냈을 때 수 많은 선물의 과도함에 적잖이 놀랐었다. 그때 받았던 선물 중 특이했던 것은 납작한 봉투 하나였다. 크리스마스에 현금을 봉투에 넣어 줄 리도 없고, 크리스마스 카드라고 하기에는 평범한 흰색 우편 봉투였다. 그 안에 든 것은 센강 유람선 저녁 식사와 호텔 숙박 예약 티켓 출력본이었다. 당시 파리가 처음이었던 나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해주고 싶었던 시부모님-당시에는 남자친구의 부모님-의 아이디어였다. 생일 선물로 가장 받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면 항상 "완벽한 하루"라고 대답하곤 했던 나에게 더없이 완벽한 선물이었다.

이후로도 생일 때나 크리스마스 때, 가끔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경험"을 선물 받는 일이 자주 있었다. 티켓을 출력해서 봉투에 넣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원더박스'나 '스마트박스'를 주로 받았다. 원더박스와 스마트박스는 프랑스에서는 흔한 선물 중 하나다. 선물하는 사람이 스마트박스 (실제로는 납작한 상자 안에 든 책자의 형태)를 사서 선물하면, 선물을 받은 사람이 책자에 있는 여러 가지 옵션 중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이다. 

책자는 호텔 숙박권, 레스토랑 식사권, 마사지나 스파숍 이용권, 스포츠나 야외 액티비티 등 주제별로 다양하게 있고, 가격대도 50유로 이하부터 300유로가 넘는 것까지 다양하다. 박스마다 다르지만, 선택지가 100여 개쯤 되는 것부터 800개가 넘는 것도 있고, 사용할 수 있는 곳으로는 프랑스 전역은 기본이고 박스에 따라 프랑스와 가까운 다른 나라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스마트박스 사이트에서 1위로 꼽힌 상품. 호텔 1박 숙박권과 두 사람을 위해 셰프가 준비한 저녁 식사를 포함한다.

남편은 스마트박스나 원더박스 같은 xxx 박스류의 선물을 크게 내켜 하지 않는다. 받는 사람이 어떤 걸 좋아할까 크게 고민하지 않은 선물인 것 같아서 그렇다고 한다. 그것도 맞는 말일 수 있다. 가까운 사이라면 조금 더 개인의 특성과 취향이 반영된 선물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잘 모르는 사람에게 선물을 해야 할 때 '괜히 엉뚱한 물건을 선물로 줘서 애물단지가 되는 게 아닐까?' '이미 집에 같은 물건이 있는 거 아닐까?'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뜯지 않는가. 그럴 때는 이런 선물이 좋은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현금이나 상품권보다는 덜 삭막한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물건이 아니라 경험을 선물하는 것의 장점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 토마스 길오비치 코넬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경험에 돈을 쓰는 것이 물건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오래가는 행복감을 준다고 한다. 이 연구에서는 특히 "기대감"이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라는 데 주목해서 보았다. 물건을 사면 그 물건이 내 수중에 오기까지 기대감도 있지만, 하루 이틀 짧은 시간 택배를 기다리는데도 조바심이 나고 물건을 가지고 나서의 기쁨은 크게 오래가지 않는다. 반면, 여행이나 콘서트, 뮤지컬 관람 등 경험을 위해 돈을 쓰는 경우 경험을 위해 계획하며 기다리는 동안에 이미 기대감으로 행복이 누적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연구진들은 이렇게 경험을 하는 것이 물건을 소유하는 것보다 행복한 이유 중 하나가 물건의 가치는 쉽게 남의 것과 비교할 수 있지만, 경험의 가치는 자신만의 것으로 남들과 비교하여 측정하기 힘들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물건은 대개 한 번 사면 거의 반영구적으로 소유하면서 낡고 뻔해지고 가치를 잃어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경험은 보통 그 경험이 나빠지기 전에 끝나거나 혹은 나쁜 경험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갈수록 미화되며 그마저 이야깃거리가 되는 등 긍정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아마 누구나 당시에는 혹독한 경험이었지만 지금은 웃으며 추억으로 이야기하는 여행의 경험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경험을 선물하는 것. 누군가에게 평생 기억에 남는 추억을 선물하는 것만큼 더 로맨틱하고 소중한 것이 있을까.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사랑하는 가족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면, 올해는 '새로운 경험'을 선물해보는 게 어떨까.

터키의 열기구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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