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포 선셋' 속 파리 따라 걷기

나는 어딘가로 여행을 가기 전에 가능하면 그 도시나 나라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나 책을 먼저 찾아본다. 그렇게 영화나 책으로 여행지를 먼저 만나면서 내 나름대로 실제로 가 보면 어떨까 상상을 해본 뒤에 실제로 여행을 가면 그냥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는 작은 디테일도 세심하게 보게 되는 것 같다. 가끔 영화나 책이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실제 여행지에서는 의외로 실망할 수도 있다는 게 부작용이지만 말이다. 사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선 여행지에서는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을 완전히 소화해내기가 쉽지 않다. 여행지에서는 들뜨고 벅차고 신난 기분을 유지하다가, 그다음 여행에서 돌아오면 그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그 책이나 영화를 한 번 더 보면서 여행에서 봤던 것들을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소화한다. 이렇게 하고 나면 비로소 그 여행의 여운이 조금은 가시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올 준비가 되는 기분이다. 그리고 언제든 그 여행이 그립고 생각날 때는 영화나 책을 보면서 다시 한번 여행에서 느꼈던 기분을 곱씹어 볼 수도 있다.

이제는 파리에서도 몇 년을 살아보았고, 여전히 원하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에 살고 있어 약간 무뎌지기는 했지만, 한때는 파리를 여행하는 여행자로서 많은 환상을 품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파리에 가 본 적이 없었을 때 많은 이가 좋아하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일명 "비포" 트릴로지, 그 중에서도 파리를 배경으로 한 '비포 선셋 Before Sunset'을 보며 파리의 거리를 상상했던 기억이 있다. 비엔나를 배경으로 한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 파리를 배경으로 한 비포 선셋 Before Sunset - 그리고 그리스의 카르다밀리를 배경으로 한 비포 미드나잇 Before Midnight 으로 이어지는 링크레이터 감독의 연작은 같은 배우진으로 각각 9년의 공백을 두고 제작된 영화다. (이 감독의 2014년 작 보이후드도 그렇고, 링클레이터씨, 혹시 장기프로젝트 마니아이신지...?) 특히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난 곳이 부다페스트에서 비엔나를 거쳐 파리로 가는 유럽 횡단 열차 안이라 이 영화를 본 많은 유럽 배낭여행자들이 나도 제시와 셀린 같은 사랑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환상도 품었으리라 생각한다. 

비포 선셋 속에서는 우리가 파리하면 떠올리는 흔한 관광 명소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흔한 에펠탑도 노트르담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파리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도 충분히 매력 있다. 오늘 글에서는 비포 선셋의 주인공 제시와 셀린을 따라 걸으면서 영화 속에 나왔던 장소들을 알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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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Shakespeare and Company

9년 전 특별한 하룻밤을 끝으로 만나지 못했던 셀린과 제시 두 사람이 9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장소인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 이미 한국 여행자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영어 서적 전문 서점이다.

영화 비포 선셋에 등장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모습

파리지앵들뿐 아니라 전 세계 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이 서점엔 "텀블위드 (Tumbleweed)"라는 특별한 문화가 있다. 서점에서 잠을 자고 지낼 수 있게 해주는 대신 a) 서점 일을 도우면서 b) 하루에 책 한 권씩을 읽어야 하고 c) 하루에 한 페이지에 해당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글로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앤컴퍼니의 텀블위드 여행자가 남긴 사진과 글. 사진/malborkmalbork

이렇게 서점 곳곳에 있는 벤치가 밤에는 텀블위드 여행자들의 아늑한 침대가 된다. 

지금까지 3만 명이 넘는 텀블위드 여행자들이 셰익스피어앤컴퍼니에 살다 갔다고 한다. 파리에 와서 텀블위딩을 경험해 보고싶다 하는 분들은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홈페이지를 잘 확인해보시고 신청해보시길→텀블위드에 대해서 알아보기!

홈페이지: Shakespeare and company

위치: 37 rue de la Bucherie, 75005 Paris (메트로 4호선 Saint-Michel역 혹은 RER-C Saint-Michel Notre Dame역)

2. 르 퓨르 카페 Le Pure Cafe

영화 비포 선셋에 등장한 르 퓨르 카페

영화 속에서 서점에서 만나 셀린이 '근처에 내가 가는 카페가 있다'라며 두 사람은 카페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사실 두 사람이 가는 르 퓨르 카페는 현실에서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그렇게 가깝지는 않다. 파리에 살 때는 이 보다 더 먼 거리도 산책 삼아 잘 걸어 다니기는 했지만, 영화보다가 갑자기 막 순간이동 하는 줄 알았다. 나도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른 웃음을 한 번 지어보면서, 영화니까 그냥 근처에 있는 카페라고 눈 감아 주도록 하자. 

르 퓨르 카페 전경. 사진/lorcan

이 카페는 사실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관광객이 우연히 걷다가 만나기에는 관광지들과 거리가 있는 11구에 있다. 파리여행이 처음이 아니라 관광객들이 많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파리를 둘러보고 싶다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은 장소일지도 모르겠다. 

Le Pure Cafe

위치: 14 rue Jean Mace 75011 Paris (메트로 9호선 Charonne역)

주변관광지: 바스티유 광장, 페르 라셰즈 묘지, 프롬나드 플랑테

3. 프롬나드 플랑테 / 라 쿨레 베르트 La Promenade Plantee / La Coulee Verte

영화 비포 선셋 속 프롬나드 플랑테를 걷는 두 주인공의 모습

이 영화에 나오는 장소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자, 어쩌면 파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로도 꼽을 수 있는 프롬나드 플랑테.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 제시와 셀린이 걸으면서 9년간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이 장면, 평범한 공원이 아닌 프롬나드 플랑테다.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는 바스티유 오페라 뒤편에서부터 파리 외곽의 방센숲까지 이어진 고가 지상철 철로를 산책로로 바꾼 길이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뉴욕의 하이라인이 바로 이 프롬나드 플랑테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작년 서울에서 개장한 서울로 7017은 또 뉴욕의 하이라인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는 아직은 관광객들보다는 주민들이 더 많이 이용하는 장소인 듯하다. 철차가 달리던 길 고가철로를 걷다 보면 기분이 묘해지기도 한다. 푸른 오솔길 (La Coulée Verte)이라는 이름답게 식물들이 많아 봄, 여름에는 푸릇푸릇하기도 하다. 

홈페이지: La Promenade Plantee

위치: 오페라 바스티유 뒤 편에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메트로 1호선/5호선/8호선 Bastille역) 영화 속 제시와 셀린은 중간쯤인 90, Avenue Daumesnil 75012 Paris 에 위치한 계단으로 들어간다. 개인적으로는 바스티유에서 부터 시작하는 걸 추천한다.

4. 쿠르 드 레뚜왈 도르 Cour de l'Etoile d'Or

황금별 안뜰이라는 뜻을 가진 영화 속 여주인공 셀린이 사는 곳으로 나오는 장소다. 쿠르Cour는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 중간에 있는 안뜰, 안마당을 지칭하는 단어다.

셀린의 아파트가 있는 쿠르 드 레뚜왈 도르 Cour de l'Etoile d'Or는 상점이나 음식점이 있는 상가가 아니라서 보통은 대문이 닫혀있다. 레뚜왈 도르가 위치한 포부르 생 앙투안 거리 Rue du Faubourg Saint-Antoine에는 레뚜왈 도르 말고도 다른 파사주나 다른 쿠르들이 많이 있다. 

- 파사주 뒤 샹티에 Passage du Chantier

- 쿠르 데 뜨와 프레르 Cour des 3 Freres

 

바스티유 광장에서부터 포부르 생 앙투안 거리를 따라 여유있게 걸으면서 기분이 내키는대로 파사쥬나 쿠르를 구경하다보면 파리의 다른 모습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쿠르 드 레뚜왈 도르 Cour de l'Etoile d'Or

위치: 75 rue du Faubourg Saint-Antoine 75011 Paris (메트로 8호선 Ledru-Rollin역 혹은 메트로 1,5,8호선 Bastille역)

파사주 뒤 샹티에 Passage du Chantier

위치: 시작 53 rue de Charenton 끝 66 rue du Faubourg Saint-Antoine 75011 (메트로 8호선 Ledru-Rollin역 혹은 메트로 1,5,8호선 Bastille역)

쿠르 데 뜨와 프레르 Cour des 3 Freres

위치: 81 rue du Faubourg Saint-Antoine 75011 (메트로 8호선 Ledru-Rollin역 혹은 메트로 1,5,8호선 Bastille역)

포스팅에 소개한 장소들을 구글맵에서 보려면 아래 지도를 참고하세요.

(Photos via Shakespeare and co tumblr, malborkmalbork, lorcan, goodmorningparis, traveller, Parisian-touch, etsionsepromenait, and wiki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