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함께 산다 - 적응

새해가 밝음과 동시에 어쩌다 보니 우리 집으로 와 함께 살게 된 고양이. (첫 만남 글 보러 가기) 준비 없이 고양이를 입양하게 된 덕분에 우리 집 고양이 맥스는 SPA에서 준 파란 박스에 담겨서 집으로 오게 되었다. 고양이들은 대부분 자기만의 영역에 예민한 동물이라 새로운 곳에 가게 되면 낯설어하고 적응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한다. SPA에서 조언해준 것은 우선 집 안에 모든 방문을 다 닫고 거실이나 방 하나에서 고양이를 나오게 해 주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방에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싶으면 다음 방의 문을 열어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식으로 천천히 집을 소개해주라는 것.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SPA의 조언대로 방문을 다 닫고 거실에서 파란 박스의 봉인을 해제했다. 맥스는 머리를 쏙 내밀어 좌우를 간단히 살펴보고는 금세 박스에서 나와 거실 곳곳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킁킁 열심히 냄새도 맡아가며 이곳은 뭘까 어딜까 조그마한 고양이 뇌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보통 낯을 많이 가리는 고양이들은 그렇게 소파 밑이나 좁은 틈으로 들어가 숨어서 며칠이고 몇 주고 나오지 않는 예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웬걸. 맥스는 몇 분도 안 돼 거실 파악을 마치고 다른 문 앞에 서서 우리가 문을 열어주기만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앞으로 살 곳을 구경하고 파악하는데 걸린 시간이 10분이나 됐을까. 집이 작은 탓도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들어왔던 고양이들의 일반적인 행동과는 너무도 달라 당황한 것은 오히려 우리 인간들이었다. 이런 맥스의 탁월한 적응 능력과 모험가적 기질은 이후 두 번이나 우리 부부를 따라 한국-프랑스 간 이주를 하면서 더욱 눈에 띄게 발휘되기도 했다. (여기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룰 수 있을 것 같다)

비행기 타고 한국과 프랑스를 왔다 갔다 한 우리 고양이

밥도 잘 먹고, 배변 활동도 쑥쑥 잘 하고, 잠도 잘 자는 맥스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집에 온 지 이틀째쯤 됐을까, 맥스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루밍"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흔히 우리가 고양이 세수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행동은 고양이들이 스스로 자기 털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온몸 구석구석 혀로 핥아 닦는 행동을 말한다. 혀가 부드러운 개들과는 달리 고양이들의 혀에는 까슬까슬한 돌기가 나 있어서 그루밍에 적합하다. 또 고양이들의 침에는 살균 성분과 탈취 성분이 있어서 그루밍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을 깨끗이 유지할 수가 있다. 그런 그루밍을 하지 않는 고양이라니. 내가 안 볼 때 하고 있겠지, 라고 생각하기에는 털이 점점 꼬질꼬질하게 떡지고 냄새까지 나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은 엄마가 그루밍하는 걸 보고 따라하면서 그루밍하는 법을 배운다. (사진은 거대 고양이)

불안한 마음에 구글링해 봤더니 간혹 너무 어린 나이에 엄마 고양이와 분리된 고양이의 경우 그루밍하는 것을 배우지 못해서 스스로 그루밍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고양이들이 모래가 채워진 화장실에 배변을 가리는 건 본능이지만, 그루밍은 본능이 아니라 어려서 엄마를 보고 따라하면서 배우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사람이 자주 고양이의 털을 닦아주고 관리해주어야 한다. 또 한가지 가능성은 고양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루밍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가능성을 고려하기에 맥스는 우리 집에 온 뒤로 쭉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평생 내가 맥스의 그루밍을 대신 해주거나, 혹은 엄마가 가르쳐주지 않은 그루밍을 인간인 내가 가르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채로 며칠이 더 지나갔다. 맥스는 여전히 이상한 냄새를 풍기며 남루한 모습으로 변해 갔지만, 혹시나 스트레스가 될까 섣불리 목욕을 시킬 수도 없었다. 그래도 그루밍을 안 한다는 사실만 빼놓고 보면 다른 면에서는 모두 완벽했다. 

맥스가 집에 온 지 나흘쯤 지난 어느 저녁, 맥스는 드디어 내 무릎에 앉아 자기 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답은 스트레스. 그루밍을 할 줄 안다는 사실에 기쁜 마음이 드는 동시에 스트레스받는 줄도 몰라줬다는 게 미안하기도 해서 복잡한 마음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렇게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 처럼 보였던 맥스도 나름대로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그걸 우리만 몰랐다. 그렇게 다시 그루밍을 하기 시작한 맥스는 알고보니 고양이치고도 꽤나 깔끔을 떠는 타입이었다. 그 뒤로 맥스의 첫 적응기는 순탄하게 흘러갔다. 우리가 맥스에게, 그리고 고양이와 함께하는 삶에 적응해 나가는 시간은 이 보다 더 걸렸지만 말이다. 

우리 왜 걱정했지...? 걱정이 무색하게 그루밍홀릭인 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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