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어필 없이도 잘나가는 프랑스 여성 뮤지션 4인

음악적 완성도보다는 자극적인 안무나 가사, 의상 등으로 가득 찬 한국 대중음악에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이 나뿐만은 아닐 것 같다. 프랑스에 사는 지금이야 내가 일부러 찾아보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케이팝에 노출되는 일이 거의 없으니 덜하긴 하지만 말이다. 물론 한국 대중음악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섹스, 폭력, 마약, 등 자극적인 소재로 가득 찬 미국 대중음악도 있고, 오늘 소개할 프랑스 대중음악에도 자극적인 주제는 있다.

 

오늘 제목에 적은 "섹스어필"이라는 표현도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주제는 여성 뮤지션의 성적 대상화 혹은 성 상품화에 가깝다. 성적 매력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의든 타의든 성적 대상화를 통해 자신을 하나의 상품으로 마케팅하지 않고도 프랑스 메인 스트림 대중 음악계를 사로잡고 있는 여성 뮤지션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들이 성적 대상화의 홍수 속에 피로한 사람들에게 공기청정기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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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엉젤 Angèle

 

가수인 아빠, 배우인 엄마를 둔 엉젤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권유로 피아노를 배웠다고 한다. (참, 오빠도 래퍼니까 완전한 연예인 집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도 연예인 부모를 둔 사람이 가수나 배우고 데뷔하면 부모 얘기하는 걸 꺼리듯이, 엉젤도 부모님의 도움으로 가수가 되었다는 평가를 크게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사실 데뷔 전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노래 영상이 화제가 되어 데뷔까지 이어지게 되었으니 완전히 부모덕을 봤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포스트 제목에 "프랑스 여성 뮤지션"이라고 적었지만 엉젤은 사실 프랑스어권 벨기에 출신이다. 2018년 데뷔 앨범 Brol이 엄청난 반응을 얻으며 히트했다. (지금도 현재 진행 중) 

엉젤 Angèle / Clique

 

최근에는 데뷔 앨범 수록곡인 Balance ton quoi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며 화제가 되고 있다. Balance ton quoi라는 노래 자체가 프랑스 버전의 미투 운동인 #Balancetonporc 에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가사 내용은 성차별을 비판하는 내용이고 뮤직비디오 역시 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차별을 다룬다. (→Balance ton quoi 뮤직비디오 보러 가기) 한 인터뷰에서는 Balance ton quoi 외에도 다양한 페미니즘 이슈를 다룬 곡을 많이 만들어 두었고, 얼른 발표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엉젤이 작사한 노래의 가사는 주제가 다양한 편인데, 돈과 명예의 무용성, 행복, 운이 없는 날 (머피의 법칙), 게으름, 질투, SNS의 부작용 등 케이팝이나 팝송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주제를 밝게 풀어내는 편이다. 

Les gens me disent à demi-mot 사람들은 넌지시 저에게 말하죠
Pour une fille belle t'es pas si bête "예쁜 거치고는 멍청하지 않네"
Pour une fille drôle t'es pas si laide "웃긴 거치고는 못생기지 않았네"
Tes parents et ton frère ça aide "부모님에 오빠까지 (연예인이라) 도움이 되겠네"

 - Balance ton quoi 가사 중 발췌

데뷔 앨범 수록곡 Balance Ton Quoi 뮤직비디오↓

 

2. 크리스틴 앤 더 퀸스 Christine and the Queens

크리스틴 앤 더 퀸즈 Christine and the Queens / Rolling Stones

본명 엘로이즈 르티시에, 활동명 크리스틴 앤 더 퀸스 그리고 크리스. 2집 앨범을 발표하면서 활동명에서 Chris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줄을 쫙 그어버렸다. 2014년 데뷔 앨범 Chaleur Humaine을 발표하면서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독특한 안무 스타일이 특징인데, 많은 사람이 마이클 잭슨을 연상시키는 점이 많다고 말한다. 실제로 크리스 본인도 마이클 잭슨을 가장 좋아하는 남성 뮤지션으로 꼽기도 했다. 프랑스 낭트 대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아빠와 중학교에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엄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다양한 문학을 많이 접했다. 그래서인지 가사가 문학적이고 모호한 경우가 많다. 본인은 사람들이 가사가 내포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음악은 근본적으로 대중 팝 음악이기 때문에 멜로디만으로 즐겨주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어느 날 '아! 이 가사가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깨닫는 식으로 자신의 음악을 여러 레이어로 즐겨주는 것이 좋다고. 가수가 되기로 하기 전에는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고, 연극 무대 연출가를 꿈꿨다. 그렇다 보니 안무나 공연 때 연극적인 요소를 많이 넣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2집을 발표하면서 Christine and the Queens에서 Chris만을 남겨두었는데, 한 인터뷰에서 크리스는 데이빗 보위의 지기 스타더스트 같은 페르소나라고 밝혔다. 차이점이라면 데이빗 보위-지기 스타더스트와 비교했을 때 크리스틴에게 크리스는 조금 더 자신의 진짜 모습에 가까운 것 같다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와서인지 갑자기 크리스의 성적 지향 (범성애)도 같이 화제가 되었다. 1집 때부터 쭉 범성애라고 밝히고 다녔는데 이제야 범성애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은 듯.

 

2집 앨범 수록곡 Damn, dis-moi 뮤직비디오↓

 

3. 제인 Jain

제인 Jain / Grizette

프랑스 툴루즈 출신. 하지만 아빠 직장 때문에 만 9살에 두바이에서 3년, 이후에 콩고에서 4년, 아부다비에서 1년을 보내고 파리로 돌아와 정착했다. 청소년기를 전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보낸 것이 음악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로 프랑스어로 음악을 쓰는 엉젤이나 크리스와 달리 제인은 주로 영어로 가사를 쓴다. 노래를 부를 때는 프랑스어 악센트가 아닌 자메이카 영어 악센트를 쓰는 게 특징이다. 어려서부터 레게나 나이지리아 음악을 즐겨 들었고, 자신이 듣기에 좋은 악센트라 그렇다고 말한 적이 있다. 주로 경쾌한 리듬과 멜로디, 긍정적인 메시지의 가사를 쓴다. 그래서인지 오늘 소개하는 뮤지션들 중 가장 히트곡(!)이 많은 것 같다. 몇 초 만에 귀에 확 들어오고 중독성 있는 멜로디 때문에 특히 광고에 많이 쓰였다. (프랑스에서 TV가 있는 가정집이라면 제인의 노래를 한 번도 못 들어본 사람이 없을 것 같다) 2집 Soldier 발표 후에는 위 사진에 나오는 점프슈트를 가는 곳마다 입고 있다. 앨범 아트는 비현실 주의 아티스트인 마그리트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한다. 1집 수록곡 뮤직비디오에서도 마그리트의 영향을 받은 요소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2집 앨범 수록곡 Alright 뮤직비디오↓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 내용이 인상적이다. "여자들이 엉덩이를 보여주는 것 말고 다른 일을 하는 클립을 보니 너무 좋다" 당신 생각=내 생각)

 

4. 클라라 루치아니 Clara Luciani

클라라 루치아니 Clara Luciani / Paloma-Nimes

오늘 소개하는 뮤지션 중 사람들이 "프랑스 뮤지션"를 떠올렸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클라라가 아닐까 싶다. 내가 생각할 때 음악 스타일 역시 가장 프랑스 샹송에 가깝다. 프랑스 마르세유 근교에서 자란 클라라는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고, 가수가 되기 전에 피자집, 베이비시터, 패션 브랜드 자라에서 일하는 등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했다고 한다. 2018년에 발표한 데뷔 앨범 Sainte-Victoire 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 샹송의 희망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누가 봐도 나 프랑스 사람이요 하는 이미지 때문인지 패션 아이콘으로 손꼽히기도 하는데 본인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다. 앞서 소개한 엉젤, 크리스틴 앤 더 퀸즈, 제인과 마찬가지로 본인의 경험이나 페미니즘에 대한 내용을 음악에 표현한다. 특히 프랑스에서 히트한 La Grenade라는 노래는 클라라가 프랑스 밴드인 La Femme의 객원 보컬로 활동할 때 객석에 앉은 남자가 "쟤는 목소리로 뽑은 건 아니다"라는 말을 했던 일화에서 영향을 받아 썼다고 한다. (La Grenade는 내 가슴속에 수류탄 품고 있다. 뭘 보냐 난 널 다치게 할 수 있다 조심해라 이런 내용...)

 

데뷔 앨범 수록곡 La Grenade 뮤직비디오 보기↓

 

사진 출처: Clique ; Rolling Stones ; Grizette ; Paloma-Nimes